조각. #3

CUT 2007/01/24 15:24

검은 바다가 일렁였다. 매서운 바람과 함께 흰 거품을 머금었다. 윙윙거리는 바람소리에 파도 소리가 묻어왔다. 나도 모르게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두꺼운 옷을 입은 연인은 부질없이 바닷가를 걸었고, 술취한 아이들은 불꽃놀이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쉭쉭거리는 소리와 딱딱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려도 별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가장 길다는 모래사장을 가로 질러 지선을 깔았다. 50미터 짜리 하나와 30미터 짜리 하나와 10미터 짜리 두개 쯤을 더 연결하고나서야 우린 겨우 조명기를 켤수 있었다. 약한 쇳소리를 내며 HMI램프가 들어왔다. 1.2킬로와트 HMI조명기는 검은 바다를 빼꼼히 밝혔고, 우린 어둠 뒤에 숨었던 성난 파도를 볼수 있었다. 바람은 계속 거세졌지만, 술취한 아이들과 부질없이 바닷가를 거니는 연인들의 숫자는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 문득 조명기를 올려다보니, 미세한 모래먼지가 램프 앞쪽을 빠르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는 몇번인가 발작적인 기침을 했다. 마스크를 내려 진득한 가래침을 뱉어내고, 팔리아멘트 한가치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게 내가 할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촬영은 계속됐다. 다음날 저녁 6시 반이 되어,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싣는 순간까지.

한달째 계속된 기침은 멈추지 않았다. 늦은밤이 되어 일상의 공간으로 돌아와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결국 다음날은 결근을 하고 말았다. 침대위에 시체처럼 쓰러져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몇번인가 타는듯한 갈증에 좀비처럼 주방까지 걸었을 뿐이다. 발작적 기침은 계속됐고, 싯누런 가래도 마찬가지 였다. 더불어 왼쪽 가슴이 뻐근해졌고, 사지는 굴신할수 없게 아파왔다. 입안이 까끌해 계속 물을 마셨지만, 개운함 따윈 느낄수 없었다. 눈알은 뻑뻑하고, 뼈 마디마디가 쑤셔왔다.

스노클자켓 속에 목까지 올라오는 두꺼운 니트를 받쳐입었었다. 알파카 목도리로 목을 칭칭 감고, 마스크를 하고 모자를 눌러썻었다. 청바지에 내복까지 입었으나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모래라는 것이 그렇다. 틈을 만들어주지 않아도, 어느세 파고든다. 동해의, 망상의 모래먼지가 온몸 구석구석 파고든 것이다. 나는 병원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늦은 아침식사를 하고 옷을 챙겨입었다. 찬바람이 끼쳐오자 발작적인 기침이 시작되었다. 나는 진득한 가래를 뱉어내고, 팔리아멘트 한가치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게 내가 할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삶은 계속됐다.

2007/01/24 15:24 2007/01/24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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