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9단.

CUT 2005/11/20 03:47
7년 열애 끝에 결혼을 결심하였을 때, 고양이 같은 여자친구와 2-3년간은 아이를 갖지 않기로 약속했다. 우린 아이 대신에 애완동물 한 마리를 키우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는데, 우리 같은 맞벌이 부부에겐 고양이밖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가 키우게 된 고양이는 흰색 페르시안 고양이와 종자를 알 수 없는 단모종 검은고양이 사이에서 태어난 녀석으로, 이름은 ‘돼지’였다. 세상에서 최고로 멋진 턱시도를 입은 고양이였다. 너무나도 멋진 털을 가진 녀석이었지만, 그 매력에 빠져 지낼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된 것이었다.
아내는 24시간에 육박하는 진통시간을 거쳐 ‘도진’이를 낳았다. 아내가 해산하고 몸조리를 시작할 때 쯤, 난 회사를 그만두었다. 왠지 그래야할 것 같았다. 아내의 임신 기간 동안 조금씩 도왔던 살림은, 자연스럽게 내 일이 되었다.
주위의 반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둔 이후에도 조금씩 일과 살림을 병행했었다. 그러나 살림은 하면 할수록 적성에 맞았다. 일은 하면할수록 나를 지치게 만들 뿐이었다. 회사에서 일할 때보다 불리한 입장에서 일들을 따내기 마련이었고, 물론 페이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렇다보니 아내도 차차 내 입장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금전적으로 큰 부담이 없었던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고수하기로 했다. 아내는 출산휴가를 마치고 직장에 복귀했고, 난 집안 살림에 더욱 충성했다.

나의 주부생활의 가장 큰 위기는 도진이가 옹알이를 시작하면서였다. 도진이는 유난히 사람을 많이 가리는 편이었는데, 그 낯가림 속에 내가 포함되어 버렸던 것이었다. 만지면 울고, 달래다 지쳐 울게 내버려두면 더 낯가림이 심해져 나의 손길에 격렬히 저항했다. 하나같이 만지면 싫어하고 안 만져주면 삐지는, 마치 고양이 가족 사이에 내가 끼어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하지만 주부된 도리로 극복해야했다.
그것은 나를 더욱 세심하게 만들었다. 나보다도 오래전부터 집안에 굴러다니던 가정의학사전 따위를 본가에서 공수하여 온가족의 건강상태를 체크했다. 물론 어머니가 몇 번쯤은 보셨었음직한 요리책 따위도 잊지 않았다. 인터넷 주부커뮤니티도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2년이 흐르자, 난 누구보다도 훌륭한 프로 주부가 되어있었다.
이제 도진이의 표정과 변 색깔만 보면 어디가 어떤지 단박에 알 수 있게 되었고, 한손으로도 능숙하게 저민 송아지 고기에 빵가루를 바를 수도 있게 되었다. 아내가 원하는 화장실 타일상태를 유지시킬 수 있게 되고, 돼지의 발에 묻지 않는 싸고 훌륭한 배변토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고 지독한 돈 관리로 아내의 품위가 떨어지게 만들지도 않았으며, 한 달에 서너 번쯤의 저렴하면서 우아한 데이트 코스를 준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돼지와 도진이는 건강하게 자랐다. 아내, 아니 마누라도 언제나 만족스러워 했다. 자신의 일을 이해하면서 집안 살림을 도맡는 나에게 감사했다.

미국 주부들의 노동 가치는 연 1억3천만원에 이른다고 한다. 한국의 상황은 사뭇 다르지만, 최근 법원이 주부의 일당을 6만5천734원으로 산정하고, 가사노동의 노동 가치를 단순 육체노동이 아니라 특수한 조건에서 일하는 특별인부의 것으로 봐야 한다고 판결한 것은 분명히 고무적이다. 비로소 한국에서도 주부의 노동 가치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남자가 전업주부라고 하면 다들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그리곤 혀를 끌끌차고, 열심히 설명을 하면 할수록 사회무능력자로 낙인찍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내가 전업주부가된 사연을 궁금해 한다. 그것은 뭔가 비극적인 사연이 숨겨져 있으리라는 얄팍한 기대심리다. 몇 살 먹지도 않은 놈이, 벌써 처자식이 딸렸고, ‘남자놈’이 되가지고 직업도 없이 집에서 살림을 한다는 것은 사회통념상 납득하기 힘들다는 걸까.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가을이 오자 지난여름 교체한 소파의 천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몇 일 동안이나 심사숙고하여 천을 갈았다. 내친김에 거실 페브릭벽지도 따뜻한 느낌을 주는 벽지로 바꾸었다.
잠이 오는지 자꾸 보채는 도진이를 안고 소파에 길게 누워 잠을 청했다. 돼지가 몇 번인가 배위에 올라와 발로 꾹꾹이를 하고 내려갔다. 짧아진 해가 금방 산을 넘어갔고, 난 마누라를 위해 쌀을 씻어 안쳤다. 이 아름답고 값진 인생, 전업주부 남성에겐 예비군훈련 면제라도 시켜주어야 하는것이다.

희망사항에 대한 기록.
逼眞, 글은 글일뿐...
2005/11/20 03:47 2005/11/20 0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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