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물.

CUT 2006/03/02 04:16
그렇다. 진절머리가 난다.
오늘은 그것을 해야한다. 내일은 저것을 해야한다. 일주일 후에 있을 무엇을 준비해야하고, 한달후의 일을 걱정해야하고, 다음학기, 졸업, 결혼, 인생, 노후를 계획하며 반복되는 일상속에 풍덩- 하고 빠져있으면, 결국엔 숨이 막힌다. 물론 콧구멍 속으로 짠물이 쏟아져들거나, 눈앞에 흐려져 한치 앞도 분간할수 없어 공포감에 휩싸이는 것은 아니지만. 산다는 것은 그렇다.

그래서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처음엔 지구의 크기를 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기차를 타자.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는 러시아의 기차에 몸을 싣고 6박 7일 보드카로 연명해 보자. 고 마음 먹었다. 마음 먹었을 뿐이다. 몇일이 지나선, 카파도키아가 보고싶어졌다. 여차하면 스키를 배울수 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류독감 운운하는 뉴스 따윈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어쨋거나, 난 올해도 스키를 배울수 없었다. 카파도키아나 지중해는 머릿속에만 그렸을뿐이다.

확신은 없다. 별볼일 없는 기내식을 먹으며 시퍼런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어떤 확신도 없었다. 그저 무언가 조금이라도 털어버리거나,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주워담을수 있다면 좋겠다는 얄팍한 기대가 있었을 뿐이다.고작해야 6시간을 날아 도착한 곳은 방콕이었다.
난 양키들이 득시글한 카오산 로드를 걸었다. 그리곤 버스를 타고 하늘과 맞닿은 라오스 험한 산길를 달렸다. 캄보디아의 천년전의 돌에 심취하기도 했고, 어느 섬에선 개집같은 방갈로에서 도마뱀과 잠들기도 했다. 다분히 전투적으로, 모든 것에서 탈출 할수 있으리라는 일념하나로. 그렇게 20여일을 보냈다. 하지만 산다는 것은 그렇다. 가끔씩은 진절머리가 난다. 결국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그곳이 아니었으니까. 결국 돌아가서 있을 수없이 많은 일들에 대한 걱정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판단중지는, 안타깝게도 자발적으로 이루어지진 못했다. 개집같은 방갈로 덕분에 더욱더 심해져버린 열대의 감기는, 나를 자꾸만 어지럽게 만들었다. 물론 감기약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바다를 마주하면 찾아오는 익숙한 현기증 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바다의 스케일이 달라, 약간의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바닷가의 모래을 밟으며 걷는 동안 파도는 쉴세 없이 밀려 들었고, 그 파도가 내 발밑의 흙을 조금씩 훔쳐갔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은 그렇게 움직였고, 모래알과 조개껍데기가 파도에 쓸려가는 모습을 보고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내 몸은 균형감각을 잃곤했다. 나까지 파도에 휩쓸려버릴 듯이, 몸이 휘청거렸다. 나는 끝도없이 펼쳐진 바다의 광대함에 위축되어 버린것일까.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그리고 그 파도가, 결국은 나를 향해 몇번인가 삼켜버릴듯이 달려들었다. 그리고 풍덩- 하고 빠져, 결국엔 숨이 막힌다. 콧구멍 속으로 짠물이 쏟아져고, 눈앞에 흐려져 한치 앞도 분간할수 없어 공포감에 휩싸이고, 수영을 배우지 않은 것을 후회하게 되는 것이다.



씨발. 내가 여기서 죽는구나. 라고 생각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무중력. 발밑엔 아무것도 없고, 간신히 물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아도 어김없이 내 뒤에선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몇 분인가 그런 생각들을 반복했다. 고작해야 20일여일의 짧은 여행의 말미에, 고작해야 인천에서 6시간 거리의 이 바다에서 난 죽는구나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잊지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쉴세없이 입과 팔과 다리를 놀리는 것이었다. 어째서 그랬는지는 모른다. 산다는 것은 그렇다. 가끔씩 진절머리가 나도, 살아야하는 것이다.
그후로 몇 번인가 파도가 밀려들고, 간신히 엄지 발가락 하나가 모래위에 안착했을때 세상이 조금은 다르게 보였다.

그리고 몇 일이 지나고, 난 2006년의 겨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은 그것을 해야한다. 내일은 저것을 해야한다. 일주일 후에 있을 무엇을 준비하고, 한달후의 일을 걱정하고, 다음학기, 졸업, 결혼, 인생, 노후를 계획하며 반복되는 일상속에 풍덩- 하고 빠져버렸다. 판단중지. 결국 산다는 것은 -- ---.


-이코-
2006/03/02 04:16 2006/03/02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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