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 #1

CUT 2006/08/01 02:52
 국민학생이 되자 나에게도 책상이 생겼다.
 아주 평범한 일자형 편수 책상이었다. 중앙의 큰 서랍과 오른쪽으로 세 개의 서랍이 딸려있었고, 책장과 더불어 작은 형광등이 딸려있는 신제품이었다. 내 책상은 안방 귀퉁이에 누나의 책상과 나란히 놓였다. 덕분에 누나와 나는 나란히 앉아 문제집을 풀곤 했다. 물론 공부에 소질이 없는 나는 누나가 문제를 풀 동안, 문제집 뒤쪽의 답안지를 뒤적거리느라 바빴다.
 덕분에 나의 평범한 책상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도 그대로였다. 책상 위에 지긋이 앉아있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므로, 큰 불편은 느끼지 못했다. 책상 위는 온통 어질러져 있기 일쑤였고, 책상서랍은 쓰레기통을 방불케 했다. 어쨌거나, 그 지긋지긋한 책상에도 조금은 마음이 드는 곳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오른쪽 서랍 세 번째칸 아래쪽에 위치한 10센티미터의 빈 공간이었다.
 정확히 언제 그 공간을 발견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당시엔 어째서 이런 공간을 만들어 놓았을까에 대한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그저 뭔가를 그곳에 숨기기에 열중했을 뿐이다. 가끔씩은 비디오 테이프를, 가끔씩은 도색 잡지를 들이기도 했다. 중학교때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이래로는 담배와 라이타를 주로 숨기곤 했다. 그곳은 나에게 있어서 가장 비밀스런 공간이었다.

 물론, 위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시험으로 보고 집으로 일찍 돌아오니 할머니가 나를 잡아 세웠다. 시험을 빙자하여 엉망진창으로 방치해둔 책상을 청소하다 담배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난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기 위해 머리를 잽싸게 굴려봤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 위기의 순간에 고작 생각해 낸 것이 친구의 것을 잠시 맡아 두었노라 둘러댄 것이다. 누가 봐도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지만, 할머니는 적당히 속아넘어가 주었다. 할머니는 담배는 몸에 나쁘다며, 아주 잠깐동안 나를 훈계했다. 그리곤 담배는 자신이 가지겠노라고 선언하고 나를 놓아주었다. 아주 잠깐동안 1300원이라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했지만, 별 도리가 없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 숨을 돌리고 나의 비밀스런 공간의 안전을 점검했다. 이것저것 마구 집어 넣다보니 서랍을 열고 닫는 동안에 담배가 흘러나온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다른 것들은 모두 안전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지났을까. 무척이나 담배가 당겨오던 그맘때쯤, 닫힌 문틈 사이로 담배냄새가 스며들었다. 방문을 열어보니 할머니가 배란다쪽 문틀에 비스듬히 기대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말보로 미디움이었다.
 아마 나는 멀리 떨어져 아주 잠깐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을 테다.

 할머니의 손가락 사이에 번들거리는 황색 필터. 쪼글쪼글한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의 입술. 그 입술에 필터가 밀착될 때마다, 총알은 유난히 붉은 빛을 냈다. 짜글거리는 소리도 냈다. 배란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할머니의 안경테와 바닥에 놓인 붉은 담뱃갑, 말보로. 할머니의 코와 입과 손가락 끝에서 허공으로 흩어지는 형용할 수 없는 백색의 담배연기... 아마 나는 멀리 떨어져 아주 잠깐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았을 테다. 그러나 그 광경은 무엇보다도 선명하게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할머니는 평생동안 끽연의 자유를 누렸지만, 돌아가시기 1년 전 자궁암 선고를 받았다. 할머니는 암선고 이후 담배를 끊었고, 난 다시는 할머니가 담배를 태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할머니를 진찰한 의사는 오진을 했다고 한다.

2006/08/01 02:52 2006/08/01 0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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