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태.

CUT 2005/11/30 03:03
초저녁부터 시작된 술자리는 밤이 늦도록 계속되었다. 시간은 이미 새벽 2시를 훌쩍 넘어버린 후였다. 판단력이 흐려지는 걸까. 집안에 온통 가득한 이름 모를 컨트리음악이 듣기 좋아지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에 실려 오는 기름내도 견딜만했다. 모든 것이 술의 힘이다. 방바닥에 너절하게 널린 카스빈병과 진로소주병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었으니까.
집안을 온통 기름 냄새로 가득하게 만들었던 주인장의 특제 스팸구이와 군만두도 슬슬 바닥나고 있었다. 주인장은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가 과자 몇 봉지를 꺼내왔다. 술이 모자랄 것 같은데. 그만 먹어요. 내일 하루 보람되게 살고 싶어. 그러나 주인장의 손은 거침없다. 꺄드득. 골골거리는 소리와 함께 소주잔엔 말간 소주가 채워진다. 그리곤 자신의 술잔을 들고 나를 향해 웃어 보인다. 마셔마셔. 어쩔 수 없이 술잔을 들고 잔을 맞부딪힌다. 주인장은 술을 입안에 털어 넣고, 다시 창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형, 잔 받아야지. 주인장은 그제야 다시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앉는다. 뭐 있어요? 응. 조금만 기다려봐. 올 때가 됐거든. 주인장은 느끼한 웃음을 흘린다. 뭐가 있다는 걸까. 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순간 건넛집의 불이 켜진다. 저 집말하는 거야? 불 켜졌네. 엇! 그래? 주인장은 벌떡 일어나더니 방안의 불은 끈다.
그리곤 12시쯤부터 잠을 청하고 있는 수험생을 흔들어 깨운다. 야야. 쇼타임이야. 엇! 그래요? 피곤하다며 먼저 눕는다던 수험생의 몸이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그리곤 주인장과 수험생은 한달음에 창가로 달려가 버렸다. 뭐야, 무슨 일인데? 난 그제야 술잔을 내려놓고 창가로 향한다. 오... 형 죽이는데요. 그지? 원래 이 시간쯤이면 들어오거든. 창가의 그들 사이에 머리를 끼워 넣으니 건넛집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가구라곤 공간박스 따위와 전신거울 정도가 전부인 이상한 집안. 뭐야. 아무것도 없네. 다시 바닥에 앉으려 돌아서는데 주인장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난 그제야 그들의 시야를 공유한다.
전라의 남녀가 집안을 활보하고 있었다. 둘은 몇 번인가 가볍고 웃고, 입술을 포겠다. 남자의 손이 여자의 등으로 가슴으로 허벅지로, 여자의 은밀한 곳으로 향하고, 여자의 고개가 꺾이고 몸이 틀어졌다. 발기된 남자의 그것과 출렁거리는 여자의 그것과, 밀고 당기는 그들의 몸짓을, 주인장과 수험생은 이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뭐야 품위 없이. 주인장과 수험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미동도 않고 창틀에 붙어 있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나의 시선은 자꾸만 창밖의 건넛집안 전라의 남녀에게로 향하고 있음을 부정할 순 없었다. 오늘은 제대론데. 주인장이 말했다. 남자 몸 좋다더니 별 볼일 없네. 수험생이 말했다. 잘 보여요? 내가 물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자친구 였다. 어어. 그냥 마시고 있어. 별 재미는 없고. 얼마 안마셨지. 전화를 들고 있는 동안에도 내 시선은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향한다. 그래, 나도 사랑해. 내가 전화를 끊자, 주인장은 나를 슬쩍보고 웃는다. 저런걸 보고 있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니. 흐흐. 수험생도 따라 웃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가슴속에 묘한 감정이 일고 있었다. 먼저 창밖의 모습에 눈을 때지 못하는 주인장과 수험생에게 연민의 감정이 시작되었다. 너저분한 관전평을 쏟아내는 그들의 입이, 그 좁은 창에 몸을 구기고 매미처럼 붙어있는 그들의 치열한 몸짓이 안타까웠다. 그리곤 창밖의 건넛집 두 사람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박하지만 그들은 자신만의 공간을 가지고,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내심 부러웠다.

난 바닥에 앉아 카스 한잔을 따라내어 마셨다. 한잔을 다 비워갈때쯤, 두 사람 역시 혀를 끌끌차며 자리에 앉았다. 고게고게.. 방안이 안보이네.. 수험생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다음에 또와. 쇼는 계속되는 거야. 주인장이 말했다. 형 나 독립할까봐. 내가 말했다. 너도 이쪽으로 와. 선릉공원도 있고 살만하다. 주인장이 말했다. 아니 원룸은 싫고, 난 아파트로 갈 거야. 주인장은 말도 안 된다는 듯 피식하고 웃었다.
2005/11/30 03:03 2005/11/30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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