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촌 안락의자.

CUT 2005/10/31 13:39
그저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들로만 가득한 골목길을 두 시간쯤 헤매고 다닌 후였다. 문득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니 늦은 오후 햇살을 한껏 머금은 라탄소재의 안락의자가 하나 보였다. 문이 붙어있던 자리엔 그 흔적들만 남아있었으므로 난 그 집의 마당 안으로는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부터가 문제였다. 마당 안에 온통 어지럽게 흩어져있는 쓰레기와 더불어 싱크대, 커다란 서랍장이 내 앞을 가로 막았기 때문이었다. 더 들어갈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가, 난 서랍장을 옮겨보기로 했다. 바닥에 즐비한 쓰레기 틈으로 안정적으로 서있는 것이 무척이나 힘이 들었지만, 다행히 서랍장은 텅 비어있었으므로 의외로 쉽게 치울 수 있었다.
문 한짝, 유리 한장 없는 집이었지만, 집안에 들어서자 바람이 잦아들고 분주한 소음들이 사라졌다. 가까이 가서 보니 내 시선을 끌었던 안락의자는 꽤나 구식이었다. 의자는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모양이었다. 얇은 나무를 가로세로로 엮어 만든 격자무늬 등판을 보고 있노라니 어렸을 적 잘사는 친구 녀석 집 마루에 있던 의자가 기억났다. 어쨌거나 그 동글동글한 의자 언저리에서 반사된 늦은 오후 햇살은 그 의자를 더욱더 값 비싸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의자 뒤편엔 커다란 괘종시계가 걸려있었다. 시계바늘은 4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멈춰진 시계추가 아니었다면 그 시간을 믿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의자와 시계만 뜯어놓고 보자면, 금방이라도 집주인이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난 잠시 머뭇거리다 왼쪽 벽에 2000년 6월 달력이 걸린 것을 보고서야 안락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찌찍찌직거리는 소리가 불안했지만 의자는 의외로 꽤나 튼실했고, 무엇보다 마음에 든 것은 시야였다. 얼추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집이라 철거를 앞둔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창문마다 커다란 구멍이 뚫린 집들이 보였고, 이미 운행이 멈춰진 철도주변에서 나물을 캐고 있는 노인네들이 보였다. 아마 이 집에 살던 누군가도 심심할 때면 이 자리에 앉았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철도 건너편 닭장 같은 아파트보다 운치가 있었지만, 철도주변에 봄나물을 캐던 노인네들이 내가 앉은 자리를 쳐다보며 손가락질을 하는 통에 난 그 집을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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