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4 - LOOP

CUT 2005/10/30 00:14
찬바람이 분다. 산길을 걷고 있다. 산길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이 길가에 촘촘히 박힌 가로등이다. 그리고 가끔씩 보이는 벤치들. 춥다. 반바지와 반팔 티는 분명히 부적절하다.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벤치에서 쉬었지만, 발바닥의 통증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얼굴에 들이치는 찬바람이다. 바람이 불때마다 머릿속이 온통 덜덜 떨린다. 뼛속까지 시리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얼굴은 지금 봉지 속에 들어있으니까. 왼손에 들린 봉지는 계속해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무언가 말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알아들을 수 없다. 시끄럽다. 바닥에 비닐봉지를 패대기치고 몇 번인가 발로 밟았다. 물컹한 느낌과 함께 벌건 피가 발바닥에 묻어난다. 다행히 발바닥은 무사하다. 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또 바람이 분다. 찬바람이 뇌 속까지 파고든다. 골이 흔들린다. 몇 번이나 주춤거리게 된다. 쓰러지면 안 된다. 이 길 끝에 그곳이 있다는 걸 난 알고 있으니까. 그 곳에 가면 난 새로운 얼굴을 얻을 수 있다. 몇 번인가 멈춰 서길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검정 비닐봉지 속에서 내가 속삭인다. 날 버리지마. 그럴 때마다 몇 번인가 바닥에 비닐봉지를 패대기쳤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가로등이 끝나있는 지점에 이르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펼쳐졌다. 난 어둠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발을 디딜 때마다 조금씩 적응이 된다. 보지 않아도 볼 수 있었다. 벌판의 여기저기엔 작은 봉분들만 있을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버려야한다. 사람 머리만한 구멍을 파고, 난 비닐봉지를 털기 시작한다. 그러자 얼굴가죽이 쏟아지듯 바닥에 떨어진다. 나 버리지마. 니가 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아. 이 병신새끼. 흙 한줌을 입에 밀어 넣는다. 곧 조용해진다. 이미 그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었다. 아무런 미련도 없다. 난 미련 없이 구덩이를 흙으로 채운다. 곧 얼굴은 자취를 감춘다. 욕지거리도 들리지 않는다. 기분이 좋아졌다. 벌판에서 벗어나 걸어온 산길로 접어든다. 잠시 벤치에 앉아 쉬기로 했다. 휑하니 뚫린 얼굴로 불어드는 찬바람도 즐길만했다. 문득 눈앞에 반짝거리는 별을 보았다.
터미널에 도착해있다. 친구들과 후배들을 만나는 자리다.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난 그 사이를 걸어간다. 친구들과 후배들은 하나같이 검은 정장을 입고 있어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자기들 끼리 즐겁고 유쾌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난 그 쪽으로 걸어간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놀란 듯 쳐다본다. 친구중의 하나가 날 발견한다. 웃고 떠들던 그 얼굴이 일그러진다. 그리고 옆 친구에게 무언가 말한다. 옆 친구도 날 쳐다본다. 또 그 옆의 옆 친구도 날 쳐다본다. 그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하나같이 불쾌한 표정으로 바뀐다. 난 다가간다. 그들은 냉정한 얼굴로 날 쳐다본다. 아무말 없이 날 바라보는 그들을 향해 난 웃어 보인다. 하지만, 난 얼굴이 없다. 열심히 설명한다. 하지만, 난 입이 없다. 손을 뻣어 가장 친한 친구의 팔을 잡는다. 손에 잔뜩 묻은 흙이 그의 옷에 묻는다. 후배들이 나를 끌어낸다. 형 얼굴이 그게 뭐예요. 중요한 자리인데. 얼굴 좀 어떻게 하고 오세요. 옷도 좀 좋은 걸로 입구요. 길가에 서서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반바지에 반팔티셔츠에 얼굴엔 구멍이 뻥 뚫려서 온몸이 덜덜 떨린다.
2005/10/30 00:14 2005/10/30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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