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 혹은 망상.

CUT 2008/09/26 04:17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었다. 텅빈 거리는 기척으로 충만했다. 나무들은 스산한 바람에 사각거렸고, 거리의 쓰레기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나는 몇 번씩이나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그러나 바람뿐이었다. 그러나 그래서인지 자꾸만 소름이 돋았다. 촘촘히 세워진 차들 사이에,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것 같았다.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라이터를 꼭 쥐었다.
마지막 모퉁이를 지날때,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렸다. 소리를 들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기척. 알 수 없는 기운에 이끌렸을 뿐이다. 거기엔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다. 똑바로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실루엣. 누런 수은등 아래에 작게 뜬 눈이 반짝거렸다.
나는 금방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재촉했다. 시계는 3시 15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나는 텅빈 인도를 걸으며, 좀 전의 고양이를 떠올려 보았다. 그러나 어떤 색이었는지, 어떤 무늬였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시커먼 실루엣에 허공에 뜬 고양이의 눈만 반짝였다. 택시 한대가 내 옆에 바짝 붙어 속도를 줄였다. 그리곤 금방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머릿속의 고양이는 커졌다 작아졌다, 털이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였다. 안광은 주황색이 되었다 흰색이 되었더 이내 시뻘겋게 되었다. 나는 더 빨리 걸었다. 가끔씩 시계를 보았고, 때때로 담배를 피웠다. 두 명의 취객과 한 명의 환경미화원을 보았고, 수십대의 빈택시를 보았다. 집앞에 이르는 마지막 횡단보도에 이르러 시계를 보니 정확히 15분이 지나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자문해보았다. 거기에 정말로 고양이가 앉아있었는가를.
2008/09/26 04:17 2008/09/26 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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