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신.

CUT 2005/10/03 01:51
恩.

왜 하필이면 '은혜 은'자였을까. 그것도 모자라 아랫쪽으론 화살이 꽂힌 하트모양까지 그려져 있다. 글씨와 하트모양은 나름대로 반듯해보였지만, 균일하지 못한 선의 굵기는 그 모양새를 한층더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한참을 지켜보다가 남자의 면면을 유심히 살핀다. 챙이 똑바른 감청색 모자, 70은 족히되어보이는 얼굴, 팔까지 걷어올린 그의 헐렁한 붉은색 점퍼, 이미 저승꽃이 무수히 피어난 그의 팔뚝, 역시나 헐렁한 체크무늬 바지에 반쯤 구겨신은 상표모를 검정색 운동화. 거기에 화룡점정과도 같은 그 문신의 색상마져 인디고블루라니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말끔한 정장을 입고서 손자와 웃으며 지나가던 어떤 노인네의 팔뚝의 '一心'이란 한자를 읽었을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으니까.

'세미젠킨스'를 기억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고,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恩'자와 하트모양을 그려넣은 동안 그의 팔뚝을 무수히 찔렀을 그 바늘엔 분명히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뱃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恩'자는 언젠간 아름다웠을 어떤 여자의 이름 한글자 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너무나도 일반론적이고 단순하기 짝이없는 나의 상상력에 제동을 건다. 그는 뱃사람이었고, 어떤 남자에게 은혜를 입어서 은혜 은자를 세겨 넣은 남자는... 그런데 하트모양은 왜 그려넣었지?

짧고 단순하고 박약한 상상력의 소유자는 금방 그 상상의 나래를 접고 만다. 마침 그때 남자는 느릿느릿하게 일어나 출구 앞으로 나와 섰다. 그의 왜소한 뒷 모습은 내가 알수 없는 세월의 흔적을 담고 있었다. 문득 그의 헐렁한 모자와 점퍼와 바지가, 시금치를 빼앗긴 뽀빠이의 그것처럼 보였던 것은, 그의 팔뚝에 하트모양 문신때문만은 아니었다.
2005/10/03 01:51 2005/10/03 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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