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3 - 변기통살인마

CUT 2005/10/29 23:49
온통 흐릿한 와중에 거울속의 내 모습은 선명하다. 난 얼굴에 면도거품을 잔뜩 바르고, 거울 앞에 서있다. 수도꼭지가 열려있다. 뜨거운 물이 계속 흘러나온다. 하지만, 세면대를 넘쳐흐르는 법이 없다. 주변은 계속 흐려지지만, 거울속의 내 모습만은 또렷하다. 난 꼭 쥐어진 나의 오른손을 들여다본다. 면도칼 대신에 시퍼렇게 날이 선 식칼이 들려있다. 면도를 해야 한다. 난 식칼로 면도를 하기 시작한다. 고개를 반쯤 젖히고, 눈을 내리깔고. 최대한 조심해야한다. 얼굴에 닿는 식칼의 느낌이 불쾌하다. 식칼은 분명히 무섭도록 날카롭지만, 면도는 쉽지 않다. 칼날이 스치는 사이사이로 면도 거품이 없어지지만, 그 아래의 수염은 그대로다.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입이 반쯤 열리고, 고개가 옆으로 조금 틀어진다. 혓바닥이 몇 번인가 나왔다 들어갔다를 반복한다.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인다. 화가 난다. 난 식칼을 내동댕이치고, 세수를 하기 시작한다. 뜨거운 물로 얼굴을 씻는다. 면도거품은 금방 씻겨진다. 하지만, 씻으면 씻을수록 이물스럽다. 문득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니, 온통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발견한다. 식칼 탓인가. 길게 그어진 상처에서 피가 흐른다. 하지만 아프진 않다. 몇 번인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상처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아프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렇게 피를 흘리고 있자니, 배가 고파졌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현기증이 났다. 거실로 나와 냉장고를 열어보았다. 온통 조미료뿐이다. 깨소금, 후추, 맛소금, 참기름, 몽고간장. 먹을 게 없다.
작은방 앞에 서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살찐 배가 보인다. 친구다. 먹음직스럽다. 무엇보다도 침대 밖으로 길게 늘어진 그의 두툼한 손바닥이 가장 먹음직스럽다. 배가 고프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무언가 먹어야한다. 오른손엔 면도하던 식칼이 들려있다. 난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친구는 깊이 잠들어 있다. 난 친구의 엄지손가락을 살짝 잡아 그의 손을 들어본다. 먹음직스럽다. 푸짐하다. 친구의 손목에 식칼 끝을 가져다 댄다. 단칼에 잘라내야 한다. 난 오른손을 번쩍 들어 그 손목을 내리친다. 하지만 노력한 보람도 없이 손목은 단칼에 잘려진다. 두부 같다. 게다가 피한방울 나지 않는다. 친구의 살찐 배는 아직도 변함없이 규칙적으로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친구가 깨어나면, 화를 낼 것 같다. 난 재빨리 방을 빠져나온다.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린다. 난 그 먹음직스러운 손을 집어넣는다. 맛소금과 후추로 밑간을 하고,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졸인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행복하다. 배에서는 계속해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지만, 조금만 참으면 된다. 순식간에 간장과 참기름은 졸아든다. 난 손을 재빨리 그릇에 옮겨 담고, 깨소금을 뿌린다. 그리고 먹기 시작한다. 맛있다. 행복하다. 손에 미끈한 기름이 묻어난다. 접시위엔 순식간에 뼈만 남았다. 난 배란다 창문을 열고, 뼈를 창밖으로 던져버린다. 그때, 작은방 문이 열리고 친구가 다가온다. 자기 손목을 누가 먹어버렸다고 화를 내기 시작한다. 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난 모르는 일이야. 친구의 눈이 가스레인지 위를 향한다. 그의 눈은 아직도 열기가 남아있는 프라이팬을 지나, 조리대위에 늘어선 조미료들로 행한다. 그리고 다시 나에게로 향한다. 친구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진다. 난 뒷걸음질 치다 배란다 창밖으로 떨어지고 만다. 화단에 떨어져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뼛조각이 즐비하다. 몸을 추스르고 있는 찰나, 거대한 살덩이가 내 위로 떨어지고 있다. 친구다.
2005/10/29 23:49 2005/10/29 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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