쫀쫀이 사랑.

CUT 2005/10/08 00:45
남자는 우산을 접고 털었다. 엄청난 날씨야. 후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우산에서 빗물이 한참동안 흘러내렸다. 남자는 한참동안 우산을 털었다. 그리곤 조심스럽게 우산을 접었다. 오늘은 그냥 들어가자. 남자는 우산을 말면서 여자에게 말했다. 피곤해? 아니. 그냥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여자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디 가기도 뭐하잖아. 남자는 여자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말했다. 가자. 집까지 데려다 줄께. 남자의 문제는 사실 '돈'이었다. 남자의 주머니엔 단돈 700원이 전부였고, 통장잔고도 7160원이 전부였으니까.

지하철을 타고, 마을버스를 타고 여자의 동네에 도착했다. 남자는 우산을 받쳐 들었고, 여자는 그 남자의 팔을 꼭 잡았다. 다행히도 빗줄기는 많이 가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미 무릎까지 젖어버린 긴 청바지는 두 사람을 여전히 괴롭혔다. 비가 안 왔으면 어디 앉아서 이야기라도 하다가 가는 건데. 어쩔 수 없지 뭐. 아쉽다. 나도. 그래.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여자가 사는 아파트 앞에 이르러서야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담배 줄까? 여자가 담배케이스에서 마지막 남은 담배 한가치를 건넸다. 미안해. 괜찮아. 갈께. 그래 조심해서 들어가. 여자는 엘리베이터를 탔고, 남자는 다시 우산을 받쳐 들고 걸어온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갔다. 남자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맛은 없고, 머리만 지끈거렸다.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다행스럽게도 마을버스가 금방 도착했기 때문에 남자는 그 빗속에서 조금이나 빨리 벗어날 수 있었다.

버스 안은 한산했다. 고작해야 몇 사람이 앉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에어컨이 꺼진 관계로, 버스 안은 습하고 후끈거렸다. 남자는 오른쪽 머리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보다가, 뒷문과 최대한 가까운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금방 다시 펼칠 우산이지만, 조심스럽게 말아 정리했다. 그리곤 핸드폰을 꺼내 여자에게 문자를 보낸다. 나마을버스탔어금방와서다행이다보고싶어. 엄지손가락을 열심히 놀리고, 확인버튼. 마을버스가 달리기 시작했다. 문자를 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자에게 답장이 온다. 벌써버스탔구나나도보고싶어잘들어가. 남자는 잠시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덜컹거리는 버스, 습하고 후끈한 공기, 무릎까지 젖어버린 청바지. 견딜 수가 없어진 나머지, 남자는 창문을 조금 열어본다. 비가 들이쳤다. 남자는 창문을 힘겹게 닫고, 멍하니 습기가 가득한 창문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핸드폰을 다시 꺼냈다. 카메라버튼을 길게 눌러, 조악하기짝이없는 30만화소 카메라를 구동시켰다. 그리곤 몇 번인가 창문에 가득한 물기를 향해 핸드폰을 들이댄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옆차선의 코란도의 붉은 후미등이 습한 창문에 어른거리자 잽싸게 핸드폰을 다시 들이댔다. 몇 번인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던 남자는, 손가락을 뻗어 창문에 하트모양을 하나 그린다. 그리고 다시 핸드폰을 꺼내들고 열심히 각도를 맞춘다. 하지만 신호는 바뀌어 옆차선의 코란도 승용차는 저 멀리로 사라져버렸고, 창문에 지독하게 많은 물기들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몇 번인가 각도를 바꾸어보다가 포기한 듯 촬영 버튼을 누른다. 찰칵. 촬영음이 버스 안에 울려 퍼진다. 남자는 느릿느릿하게 뒤를 돌아본다. 하지만 눈만은 재빨리 굴렸다. 남고생 하나가 창문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뒷좌석의 아줌마의 시선도 흔들렸다. 남자는 재빨리 사진을 저장한다. 그리곤 창문의 하트모양을 쓱 지워버렸다. 남자는 방금 찍은 사진을 확인했다. 배경이 심심했다. 예쁜 불빛도 없고, 하트 모양도 흐릿했다. 남자가 창문 쪽을 다시 쳐다보았으나, 창문엔 온통 물기들만 끈적끈적 거렸다. 손자국 덕분에 다시 그릴수도 없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다. 남자는 쩝쩝 입맛을 다신다. 남자는 핸드폰 컬러메일을 작동시키고, 좀 전의 아쉬운 사진을 여자에게 전송한다. 사랑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사진을 전송한 후 남자가 몇 번이나 핸드폰을 꺼내보았지만, 여자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남자가 마을버스에서 내리고, 지하철을 탈 때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남자가 탄 지하철이 동작대교 위를 지나고 있을 때쯤, 여자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잘가고있지?보고싶다. 남자는 통화버튼을 눌러 여자에게 전화를 건다.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몇 마딘가 오간 후에, 남자는 쭈뼛거리며 물었다.

사진 안갔어?
2005/10/08 00:45 2005/10/08 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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