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the cut.

CUT 2005/09/19 03:38
적당히 살이 오르고, 안경을 쓴 얼굴은 꽤나 친절해 보였다. 조금은 희끗희끗한 머리칼은 그 친절함을 배가시킨다. 남자가 멈춰 서서, 자신의 여행용 가방에서 꺼낸 것은 다름 아닌 커터 칼이었다. 남자는 웃는 얼굴로 제품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커터 칼은 색상과 크기가 제각각이라, 쓰임새에 따라 그 용도를 정해 놓기 좋다고 했다. 커터 칼 5개에 한 세트, 가격은 단돈 천원이었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도 조악한 포장은 그 성능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기에 충분했고, 언젠가 묶음으로된 싸구려 커터 날의 허접한 성능을 경험해 보았던 나로서는 도무지 구미가 당기질 않았다. 아마 금방 날이 무뎌질 것이라 생각했다. 아주 잠시 동안 5개란 숫자에 혹하긴 했지만 나의 의지는 쉽게 흔들리지 않았다. 단지 지하철에서 파는 커터 칼은 왠지 부적절하다는 생각만이 머리를 가득 매울 뿐이었다.

남자는 한참을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지 않았다. 결국 남자는 집어 들었던 커터 칼을 자신의 여행 가방에 다시 넣었다. 남자는 잠시 풀었던 짐을 분주히 챙기고는, 다음 칸으로 이동을 준비했다. 남자는 단 한 개의 커터칼도 팔지 못했지만, 시종 웃는 얼굴이었다. 남자는 가방을 끌고가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다.
남자가 내 앞을 지나는 순간 왜소한 그의 오른팔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옷으로 가려진 어깨부터 팔 안쪽으로 길게 남은 흉터. 그리고 라운드 티 목덜미로 언뜻언뜻 보이는 형형색색의 문신들.
문득 찾아든 섬뜩함에 난 시선을 돌린다.

남자는 다음 칸으로 이동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난 그제야 남자 쪽으로 시선을 돌려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머릿속에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그의 백그라운드에 대한 상상은 한참을 계속되었다. 그에겐 어떤 사정이 있을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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