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가 세워져 있는 골목.

CUT 2005/11/02 00:19
철거가 시작된 후로 골목엔 아이들이 줄어들었다. 대신에 골목길엔 쓰레기들이 즐비해지기 시작했다. 작은 컵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장롱까지 골목길에 쌓이기 시작하니 사실 길이라 부르기도 무엇했다. 쓸만한 물건들은 날이 바뀌면 없어지기도 했으나, 그것들이 없어진 만큼 쓸모없는 물건들이 길가에 버려졌다. 열받은 철거용역업체 직원이 빨간락카로 골목벽에 써놓은 ‘쓰레기버리는놈애미는창녀’라는 말이 무색했다.

그러던 어느날, 기타 하나가 골목길 어귀에 등장했다. 분홍색과 흰색 줄무늬가 그려진 유치한 색상의 기타는 어디 깨진 곳도 하나 없었다. 기타줄이 헐렁하게 늘어지긴 했어도 기타줄 6개가 말짱했다.

담장들은 벌써 다 무너지고, 유리조각과 쓰레기가 즐비한 골목길을 누비던 동네 꼬마들에게 기타는 기막힌 장난감이 되었다. 차마 집에 들고 가진 못하고, 줄을 퉁겨보며 폼을 잡았다. 어디서 보았는지 길가에 어퍼진 장롱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고 엉터리 코드를 잡고 줄을 퉁겨본다. 사실 기타보다 꼬마들의 입에서 더 큰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기타가 골목길 한켠을 차지한 이후로 골목길엔 아이들 노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꼬마들은 학교가는 길에, 집에 돌아오는 길에, 또 두부를 사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기타 한 두곡씩은 꼭 연주하고 갔다.
해가 떨어지면 기타소리와 아이들이 노는 소리는 잦아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면 기타는 골목 안으로 몇 발짝이나 더 들어와 있었다. 아이들이 기타주변에 모여 연주를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기타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왔다.

어느 날 저녁 동네 노인 하나가 그 기타를 발견하고는 버려진 의자위에 앉아 기타를 집어들고 조율을 시작했다. 늘어진 기타줄을 팽팽하게 만들고, 굳은살 박힌 손가락으로 코드를 잡았다. 소리는 점차 기타다운 소리를 내기 시작했으나, 노인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줄을 풀어보기도 하고, 감아보기도하고 이 줄, 저 줄 퉁겨보았으나 영 탐탁치않은지 한숨을 쉬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았다가 결국은 기타를 버리고 가버렸다.

다음날 다시 기타를 찾은 꼬마들은 밤새 바뀐 기타소리에 탄성을 질렀다. 골목길엔 한층 우아하지만 여전히 괴팍스러운 기타소리와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가득했다.

기타가 세워진 있는 골목 - 박현수

우리 골목엔
누군가 버린 기타가 있어 아이들은
차마 들고 가진 못 하여
저마다 노래나 한두 곡 하다간 간다
옆집 쓰레기통 앞쯤에서
울리던 기타는
이제 나의 자취방 앞까지 와서
오늘 하루
아이들의 노래는 공으로 들었다
얼마나 신기한 영혼들인가!
기타줄을 아무렇게나 두드려도
저들의 노래는
은핫물이 되어
오늘 하루 빈 골목을 씻어내고 있다


오늘 나는 온 종일
벽에다 귀를 바짝 붙이고 서서
괴팍스런 기타에 섞인
그들의 영혼을
찬찬히 찬찬히 걸러내고 있었다
2005/11/02 00:19 2005/11/02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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